
동일소식
독서마당
『외로움과 고독』
- 성서마당, 2024년 여름 150호 -
발제자: 우승민
본서는 한국성서학연구소에서 발간한 정론지이다. 올해 여름호에서는 ‘외로움과 고독’을 표어로 삼았는데,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하는 시대이지만, 외로움에 지쳐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과 공동체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된 독거노인, 은퇴자들, 실업자들, 부부들, 젊은이들의 삶의 자리를 담아내고자 했다. 기독교는 외로움을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고독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나아가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해당 호에서는 고독을 통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을 성서의 지평에서 찾아보는 시도를 했다.
유수한 학자들의 글이 기고된 잡지에서, 한줄 요약으로 본서를 알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본고에서는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챕터를 소개하는 식으로 글을 이어가려 한다.
「장성민, 당돌한 고독 – 마가복음 15:42~47을 중심으로」
1. 본문 번역
가. 번역
그리고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는데, 아리마대 출신으로서 명망 있는 공회원이었던 요셉 – 그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 와서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몸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가 벌써 죽었는지 의아해하며 백부장을 불러 그가 죽은 지가 오래냐고 물었다. 그리고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 호의를 베풀어 그의 주검을 요셉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요셉은 고운 천을 사서, 그를 내린 후 그 천으로 그를 싸서 돌을 파서 만든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두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가 놓인 곳을 보았다.
나. 본문의 메시지
여기 고독한 한 사람이 있다. 어쩌면 고독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짓누 르던 고질병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래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모르긴 해도 그 기다림은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 어린 시절부터 조금씩 싹텄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끝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온 유대를 통치하던 헤롯 대왕이 죽고 빌라도라 불리는 로마 총독이 그 땅에 부임할 때까지 그가 기억하 는 것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외치며 혁명 대열에 가담했지만, 작렬하는 태양에 쉬이 말라버리는 이슬처럼 가여운 목숨만 허무하게 스러져 갔을 뿐 하나님 나라는 여태 도래하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은 기득권을 누리느라 부활조차 믿지 않고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이른바 민족의 지도자들은 총독의 비위를 맞추고 민심의 눈치를 살피느라 급급 했다. 그러니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일이란 아직 순진한 아이 들이나 이미 괴팍하게 늙어버린 노인네나 꿀백일몽일 뿐, 냉혹한 현실 정치에 몸담은 산혜드린 공회원이 품을 꿈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희망을 흐릿하게라도 품고 사는 삶은, 정세로 보나 동료들과의 관계로 보나 명민하게 처신해야 할 현실로 보나 은밀한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부조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외로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
한때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갈릴리 출신의 순회 선지자에게 희망을 걸기도 했다. 온 백성을 종말적 기대로 들끓게 했던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정치적 염려와 헤로디아의 간교한 적의를 견디지 못하고 처참하게 참수되었을 때만 해도 고독한 희망이 냉철한 절망으로 굳어지나 싶었는데, 예 수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노라고 선언하고선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기의 선포를 능한 가르침과 행적으로 입증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 희망이 다시 움트는 것을 느꼈다. 유월절이 다가올 무렵 그가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바야흐로 이제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구나 싶어 내심 어린아이 같은 조바심을 품기도 했다. 평생 해방과 구원을 기념하며 유월절을 지켰건만 기대했던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나지는 않고 절망만이 희망을 집요하게 갉아먹고 있었는데, 갈릴리와 이방 지역만을 떠돌던 나사렛 예수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온다니!
하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대제사랑과 총독의 협잡으로 순식간에 로마에 대항한 반역자요 백성을 어그러진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로 낙인찍혀 체포되었고, 산헤드린 공회는 절차도 무시한 채 새벽부터 재판을 강행하더니 미처 손쓸 겨를도 없 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사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총독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형 집행을 허락하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며칠 만에 벌어졌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리라는 순전한 희망은 순식간에 가공할 현실로 돌변해 버렸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십자가 처형은 고문과 살인에 이력이 난 로마 군인들의 손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얗게 지샌 밤을 지나 형 집행을 지켜보느라 아득했던 정신을 차려보니 예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미 운명한 이후였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니 날은 벌써 저물고 있었다. 그제야 회한이 몰려왔다. 온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저 거짓 선지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칠 때 왜 주저했을까?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며 의아해하고 갈등할 때,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부추겨 바나바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을 때 왜 망설였을까? 하지만 더는 주저하거나 지체할 수 없다. 갈릴리에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이제 오간 데 없지만 혼자라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정치적 입지를 근본부터 뒤흔들어 놓더라도 말이다.
홀로 빌라도에게 들어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로마의 반역자로 처형된 선지자의 시신을 요구하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임을 알면 서도, 총독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피지배 민족의 대표기구에 속한 공회원에 불과한 알량한 신분이 한없이 하찮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로지 교활한 통치자의 무조건적인 호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럼에도 홀로 빌라도를 찾아간다. 무력함을 억누르며 그에게 당돌하게 요구한다. 모두가 버리고 도망쳐 버린,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내어 달라고.
빌라도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해는 넘어가고 일몰은 다가오는데,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던 빌라도가 돌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현장 책임자였던 백인대장을 부른다. 그에게 묻는다. 예수가 벌써 죽었냐고. 그가 죽은지 오래냐고. 백인대장의 설명을 듣고서도 한참을 주저하더니 결정을 내린다. 방 금 처형된 시골뜨기 선지자의 주검을 저 사람에게 인계하라고.
예수의 몸은 끔찍한 고문과 채찍질로 인해 처참하게 찢기고 갈라졌다. 이대로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십자가 처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월절 축제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는 인파를 헤집고 애써 포목점에 당도한다. 고를 새도 없이 고운 천 하나를 빼앗듯 구매한다. 그 고운 천으로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감추며 형장으로 달려간다. 멀리서 보니 곱게 물든 노을 탓인지 형틀의 윤곽이 또렷하다. 차마 눈을 들어 십자가를 쳐다볼 수 없다.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진 채 초라하게 달린 시신을 형틀에서 조심스레 내린다. 몸을 씻길 여유도, 몸에 부을 향유도 없다. 낚아채 온 고운 천으로 그저 예수를 감싼다.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비천한 영혼을 휘감고 원망과 무력감이 뒤엉켜 온몸이 들끓는다.
전율하는 몸과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고운 천에 싸인 예수를 돌로 판 무덤에 안치한다. 비릿한 피 냄새와 그을음이 뒤엉켜 숨조차 쉬기가 힘들다. 이리저리 일렁이는 횃불에 컴컴한 동굴이 사위로 일그러졌지만, 그제야 찬찬히 살핀 시신은 벽감에 가만히 누운 채 외려 잠든 듯 안온하다. 행여 깰세라 조심스레 뒷걸음치며 무덤에서 나온다.
분주함에 잠시 밀려났던 외로움이 불현듯 다시 밀려온다. 인부들과 힘을 합쳐 입구를 막도록 다듬어 둔 돌을 굴린다. 더디게 굴러가던 바위가 입구와 아귀가 맞자 거친 호흡도 잦아든다. 하지만 심장은 더욱 세차게 요동친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굳게 막힌 입구를 살핀다. 이제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는 짓누르는 고독만큼이나 육중하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영혼을 감싼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일은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겠으나, 이전과는 전혀 같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 그것은 냉철한 희망을 품은 당돌한 고독일 것이다. 저 멀리 샛별이 떠오른다. 안식일이 시작되었다.
「느낀 점 및 우리 교회에 적용할 점」
모든 성경 본문을 이러한 방식으로 원문의 표현에 주목하며, 시대적 배경과 정황을 반영하여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또 원전을 분석할 정도로 원어(성서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숙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성경공부 및 묵상은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개역개정 성경을 통해서 보는 것 이상으로 본문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을 입체적으로 읽어본 경험이 있다면, 그 유익을 알아서라도 원전 읽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우리 교회는 원전을 읽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잘 갖춰져 있다. 기회가 된다면, 희망하는 성도들과 함께 원어로 성경 본문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시도해봤으면 좋겠다. 성경을 이해하는 또 다른 지평을 경험할 때, 지적인 앎은 물론 성도들의 영성에도 깊은 유익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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